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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날, 샌즈의 구한말 조선왕실 외교 고문 경험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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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날, 샌즈의 구한말 조선왕실 외교 고문 경험담

작동미학 2023. 8. 20. 10:37

 William F. Sands(미국인, 1874∼1946)는 20대 중반 시절을 조선의 외교 고문(1900~1905)으로 지냈다. 그도 다른 미국계 외교관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의 경험을 시작으로 조선에 들어왔으며, 미국공사관 업무(1등 서기관)를 시작으로 해서 조선의 외교 고문이 되었고, 앞서의 묄렌도르프나 대니, 샐르 레장드르나 그레이트 하우스 등을 이어서 그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조선에서의 생활과 그 경험담을 책으로 남겼다.(조선의 마지막 날, 원제:Undiplomatic Memories, 1930 - 불행히도 번역본은 절판되어 중고로만 구할 수 있다)

 

William Franklin S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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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마지막 날

조선의 마지막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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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책에는 초기 미국인을 외교 고문으로 하는 것에 대해 조선 왕실은 미국의 우호적인 지원(경험많은 노련하고 나이많은 외교관이 가능한)을 기대하고 있음을 적고 있다. 하지만 나름 젊은 샌즈는 그런 부분이 원활하지도 않을 것이라 믿고 있었고, 타 고문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일한 것이 그다지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의 입장에서 해당 고문 역할을 하고 싶어했고, 또 그렇게 한 행적을 적고 있다. 또한 외교 고문이지만, 내부 교육제도나 행정/법제도 개편 등 그 나름의 제언도 진행하였고, 책에는 심지어 전염병 처리에 대한 내용도 나온다. 외교 고문으로써 각 국가간의 분쟁처리나 국제적인 이권처리 등에 대해 현안들도 처리했다.

 

 그가 바라본 조선은 약한 나라에 대한 열강의 이권 각축장의 전형적인 장소였다. 어느 나라 외교관이 조선에서 이권을 얻어가면 나머지 국가의 외교관들도 유사 이권을 얻어가려고 난리였으며,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업적이 낮아지거나 무능해보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업가 없이도 공사들이 스스로 사업 제안을 하기도 했다고 적고 있다.이러한 이권 쟁탈전은 결국에는 국부의 유출로 이어지게 되는 안타까운 상황을 만들게 됨을 지적한다. 그리고 러일전쟁 이후에는 결국 일본이 이러한 이권들을 거의 접수하게 되는 모양새였던 것이다. 외국인 거류지의 위치는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철 수 할 수 있도록 한강 이남이나 인천으로 빠질 수 있도록 구성하고 있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이권을 챙기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도주해버리는 것이 각국 공사의 모습으로 비춰진 것이다. 자국의 국민들을 보호하지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방관하는, 젊고 정의로운 Sands의 눈에는 이런 것들이 매우 불합리해 보였다.

 

 조선 전체의 운영이 각 신하들이 아니라, 결국은 왕실을 통해서 결정되고 진행되므로 외교관들은 고종을 알현하는 권리를 얻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이런 상황은 외부 소식과 신문물이 필요한 조선 왕실의 필요가 맞닿았다, 따라서 외교관의 통역사들은 왕실알현을 자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실은 내시나 민씨 일가 같은 측근, 그리고 이 외교관을 주요 대화 채널로 삼았던 것이다. 지난번 소개했던 윤치호의 일기와도 일맥상통한다. 조선주제 외국 공사들은 조선왕실을 직접 만나 대화할 수 있는 몇안되는 사람들이었다.

 

 다양한 인물 소개가 있는데, 명성황후에 대해서는 좋게 적고 있으나 고종에 대해서는 그리 좋지 못하다. 조선의 이권에 대해 러일의 충돌이 불가피함을 느낀 Sands가 고종에게 조선 중립안을 열심히 설명하고 각 국가를 설득해보려고 했지만, 지루해하며 별 관심이 없어보이는, 국제 정세에 그렇게 밝지 못한 조선의 왕을 안타까워했고, 그나마 어떻게든 외국의 사정을 파악하려고 하고 기민하게 대처한 명성황후의 죽음에 대해서는 안타까워 했다. 관련하여 왕비가 얽혀있는 임오군란과 을미사변에 대해서도 적고 있다.

 

"코리아를 중립화하려는 내 구상은 자취도 없이 스러져 버렸다. 물론 나는 황제에게 기회가 닿는 대로 자주, 그리고 상세하게 나의 단순한 구상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 가엾은 분은 그것의 기본적인 개요도 파악하지 못했다"

 

 왕실을 가까이서 보위하는 내시와의 관계 중요성도 언급되어 있다. 내시들은 왕을 보좌하기 위해 각국 공사에 질의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전달하는데, 집요하고 자세하게 여러번 묻는다고 불평하는 사례가 나온다. 다만 그들은 끊임없이 그 정보를 자신들의 이권에 맞게 왕실에 전달하기 때문에, 수석내시와의 원활한 협업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해질 때부터 해뜰 때가지 사무실을 지켜야 했으며 언제라도 황제를 뵙고 질문에 답하고 보고서에 대한 조언을 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했다. 또한 궁궐 외교의 비밀스런 움직임을 샅샅이 파악하기 위해서는 황제를 모시는 내시들과도 잘 어울려야만 했다"

 

 러일전쟁전에 한중일 대동아 공영권에 대한 아이디어로 고종을 비밀리에 만났던 이토 히로부미를 일본인 거류지로 찾아가는 장면도 나온다. 샌즈에게 러시아 외교는 예측불가의 알수 없는 면이 있었지만, 일본은 매우 디테일하게 일관되었으며 오히려 지나치게 자세하고 정중했다고 적고 있다. 청일전쟁 승리 이후에는 마치 조선의 보호국인양 행세하면서 타 국가 공사들은 한 수 아래로 보는 상황도 묘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정중했으며 집요했다고 한다. 한일합병 이라는 단일 목표를 세우고 지속 추진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와의 면담 과정에서, 이토가 당시 조선왕실에 일본과 더 긴밀한 동조를 제안을 하면서, 조선이 임진왜란이나 을미사변 등 때문에 일본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고, 그가 여러가지 조선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놀라워하는 장면도 나온다. 이토 히로부미는 외교수장으로서 총리로서 조선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 조선 초대통감에 취임한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엄상궁이나 이채연(보빙사 일행이었고 박정양과 함께 초대 미국 공사 일행이었던), 알렌 등 여러 선교사들과의 일화, 외교 고문 시절의 주변 조선인과의 에피소드 및 다양한 그당시 사회 정황 들도 적혀 있는 점이 흥미롭다. 당시 조선의 관점에서 고군분투 했던 또 하나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다지 외국의 사정에 밝지 않으면서 주변국중 가장 약한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여러가지 비리나 구조적인 문제들이 자신들의 개혁안으로는 잘 바꾸지 못했던 답답함이 군데군데 묘사되어 있다. 특히나 외국 각 세력들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비판한 점도 눈에 띈다.

 

 인터넷에 링크되어 있는 그와 관련된 자료를 아래 공유한다.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fs_007_0010_0020_0040_0020 

 

자료일람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 자료 현황과 해제 --> 2. 자료 현황과 해제 1) 미국 필라델피아 아치디오세슨 역사기록보존소 소장 샌즈문서 (1) 개인문서 샌즈의 개인 문서는 미국 필라델피아 아치디오세슨 역사기록보존소(A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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