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산책
청한론/데니의 서한집/묄렌도르프 자서전/반청한론 본문
오늘 살펴볼 기록은 1880년대에 외교/통상 고문역할을 했던 두 외국인에 대한 것이다. 바로 독일인 묄렌도르프(R. von Mollendorff/독일어 표기가 완전치 않다)와 미국인 O.N.데니(Owen N. Denny)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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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인물은 어찌보면 당시 청국/일본/러시아/미국 사이의 조선의 외교사에 큰 역할을 끼쳤다. 특이한 것은 조선이 막 개항을 시작하고 외교나 국제법, 통상에 대해 처리할 인물이 없을 때 당시 강하게 영향을 끼치던 청국의 이홍장을 통해 소개받은 외국인이라는 점이다. 묄렌도르프는 원래 청국 주재 독일 영사관에서 일했다가 적절히 승진하지 못하자 아예 그만두고, 이국땅 청국의 관료로 일하기 시작했고 이때 이홍장의 눈에 들어 조선으로 파견된다. 소개한 책에서 그의 이러한 인생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는 조선에서 높은 자리로 가는 것에 대한 꿈에 가득하여 조선으로 향한다.
묄렌도르프는 데니의 청한론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주장하는 것에 반대하는 반청한론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어느 편에서 정책을 펼쳤는지 평가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전체적으로는 두 명의 고문 모두 다 조선에 대한 청나라와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러시아나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다가 타국(청나라나 영국, 일본)의 미움을 샀다고 보는게 맞다. 다만 묄렌도르프와 데니는 선임과 후임으로서, 특히 묄렌도르프가 데니를 비난하면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다는 점에서 둘은 다소 대립관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묄렌도르프는 반청한론을 통해 원세개의 고종 폐위 음모나 조선의 청에 대한 속국문제를 청의 시야로 다루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그가 조선과 다양한 나라들과의 조약을 체결한 점이나, 청과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주장하여 일부 관철시킨점(한러 1차 밀약) 등으로 고종과 민씨 일가의 신뢰를 얻었다고 알려져있다. 더군다나 갑신정변때 부상당한 민영익을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킨 후 미국인 의사 알렌에게 치료받게 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후 청나라로 돌아간 후 1900년에 이르기까지 홍콩과 상해를 전전하며 피신했던 민영익을 통해 교류하면서 지속 조선에 다시 복귀하여 활약하는 문제를 조선 왕실과 지속 거론하다가 1901년에 중국에서 세상을 떠난다.
데니도 역시 청의 소개로 조선의 고문이 되었으나 묄렌도르프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조선의 입장을 변호한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교류하면서 청과 일본 양측에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로 청에서 파견한 원세개(위안스카이)는 여러가지 책에서 묘사되었듯이 공과 사 구분없이 조선 관료들과 관계를 맺고 여러가지 이권문제를 청과 자신에게 유리하게 간섭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데니는 이러한 폐단에 대해서는 청국공사가 벼락에 맞아 날아가는 편이 사람과 짐승 모두에게 도움이 될것이라며 소개한 책의 서한집에서 밝힐 정도였다. 통상과 외교에 대한 고문 역할에 있어서 청의 간섭과 횡포가 최대 적이 되었던 본인 재직시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이는 묄렌도르프도 마찬가지다. 이홍장이나 원세개에 대해서 그도 어쩔 수 없이 사이가 가까운 만큼, 정중하게 묘사하고는 있지만 그 청국과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러시아와의 관계개선을 제안한 이가 바로 묄렌도르프였던 것이다. 아마 당시 독일과 러시아의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에도 영향을 받았을지 모르겠다.
이 두 기록을 읽기 전까지 청과 일본 사이에서 러시아의 관계개선은 조선 정부의 생각이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묄렌도르프의 친러시아 정책이 초기 조선 조정에서 반대에 부딪혀 잘 진행되지 않았다는 기록을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해당 국제 세력관계에 대한 외국인들의 조언을 조선 정부가 받아들였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주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존재했다는 것이 이 기록에서 확인된다.
데니가 알렌에 대해 부정적인 언급을 하는 것도 눈에 띈다. 알렌이 고용한 광산 기술자가 문제를 일으켰다거나 등 조선 정부에 몇가지 폐를 끼친 것을 가지고 비방하는 내용이 대표적이며 그외에 조선미국공사를 미국에 소개할때 여러가지 해프닝들이 있다.
묄렌도르프는 자신의 조선 외교 고문으로 있었을때의 업적에 자부심을 가지고 민영익과의 좋은 관계를 지속 밝히고 있다(민영익의 홍콩/중국 도피 생활에서 자신과 함께하지 않으면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는 언급이 반복된다.) 데니의 경우에는 자신의 조언대로 재정 정책을 행하지 않은 조선 정부에 대해서는 다소의 원망을 가지고 있긴 하다. 그러나 여러가지 이해관계에도 불구하고 데니의 청한론은 조선의 독립 쟁취를 위한 여러가지 변론으로서 매우 고맙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청국의 조공국으로서 조선의 애매한 위치에 대해서 적극 변호하며 독립된 주권을 가진 국가로 지속 주장하고 있다. 이는 이홍장이 맺은 청일간 텐진조약이나 기타 조미통상조약 등 다양한 조약에서 이홍장이 그 주권 독립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청국의 정책을 이용해 항변하고 있다. 즉 청의 정책을 정리하여 조선을 청에서 독립된 주권을 가진 국가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1880년대 뒤늦게 청국이 군사력을 들먹이면서까지 조선을 복속시키려는 노력이 진행되는 시기에 데니가 공개한 고종이 미국의 대통령 아더(Chester A Arthur)에게 보낸 편지가 새삼, 당시 조선의 자주권 확보에 힘썼다는 사실 자체를 돋보이게 한다.
"조선의 국왕 짐은 이에 국서를 보냅니다. 예로부터 조선은 중국에게 조공을 바친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조선의 국왕은 국내외의 모든 문제에서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조선과 미국은 이에 상호 동의에 따라 조약을 맺으면서 평등을 기초로 하여 상대국을 대우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국왕은 분명히 공언하건데, 짐은 국제법에 따라 본 조약을 체결하면서 신의로써 자신의 주권을 완전히 수행할 것입니다. 청국에 대한 조공 국가로서의 조선에 부과된 의무에 관해서 미국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약을 교섭케 하고자 사신을 임명한 지금 이와 같은 예비 선언을 해두는 것도 짐의 의무로 여겨지는 바입니다.
- 1882년 5월 15일 미국대통령 각하"
조선은 대륙의 힘이 커지면 중국쪽에 복속되다가 한동안 평화로운 관계를 맺어왔고, 청국이 조선의 이권에 눈을 뜨자 최대한 그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하던 여러가지 노력이 데니에 의해서 표현되지 않았을까. 데니의 청한론이 고마운 이유다. 당시 청국에서 벗어나려는 조선의 국권 회복 노력을 잘 볼 수 있다.
그리고 또하나 데니와 관련한 재미있는 것은 국내에 가장 오래된 태극기가 바로 고종이 데니의 미국 귀향길에 선물한 태극기라는 점이다. 데니의 후손의 1981년에 국내에 재기증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러모로 뜻깊은 인연을 맺은 인물이다. 아래가 그 기사이다.
http://www.hmh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684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가장 오래된 '데니 태극기' - 한韓문화타임즈
국립중앙박물관은 제102주년 삼일절을 맞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태극기인 '데니 태극기'를 오는 23일부터 3월 8일까지 상설전시...
www.hmhtimes.com
여러모로 소개한 책은 이 외국인 둘의 조선 근무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알 수 가 있다. 이 시기 조선의 국제관계에 대해 궁금한 사람은 꼭 읽어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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