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산책
건건록 - 무쓰 무네미쓰가 이야기하는 청일전쟁 본문
이 책은 기도 다카요시와 이토 히로부미 등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의 최 측근이었던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가 남긴 청일전쟁에 대한 기록이다. 전부터 구한말 당시 외교관들의 정리된 내용을 읽는 것이 여러가지 시사점이 많다고 느끼는 것을 더 강화해주는 책이었다. 여러가지 논란이 있지만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그래서 타 기록들과 비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청일전쟁을 둘러싼 일본의 내각 사정과 열강의 간섭에 대해 상세히 적혀있다. 그리고 사실은 청일전쟁의 명분이된 조선의 동학농민운동이 그 서두에 자리잡고 있다.
이 책의 내용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이미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기 전에 일본내각은 7월13일 조선주재 일본공사 오오도리에게 실제적인 행동을 하라고 전보를 보냈다. 다양한 열강간의 조율과 청일 전쟁 개전이 이미 진행중이었다. 일본 내각은 이미 파병시기부터 청일전쟁을 각오하고 있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다만 청국이 이를 실제로 예측하지 못했고, 소극적으로 행동한 셈이 되었다.
2) 일본은 군사 8천명을 서울 인근에 파병한 후, 동학농민운동이 약화되자 받은 조선과 청으로부터의 철군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 일본은 청국에 같이 조선을 개혁하자고 제안하는데 당시의 청국의 최고책임자인 북양대신 이홍장은 아래 사유로 거절한다.
- 동학농민운동이 진정상태인 점에서 연합작전할 필요가 없다는 점
- 조선의 개혁은 조선이 알아서 할일이지 청과 일본이 나서면 내정간섭이라는 점
- 양측 철군 논의는 이러한 개혁 논의와 별도로 진행해야한다는 점
이홍장의 의견은 상식적인 수준임에 비해 일본측은 조선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며 억지를 부리는 모양새인데, 무쓰 무네미쓰 자신도 조선의 개혁에 대해 회의적이며 모든 상황은 조선의 개혁과 성공이 아니라 일본의 이익에 기준해 판단할 문제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7월 23일 자정을 기해 일본은, 나중에 발견된 군 작전 계획문서에 나타나듯이, 서울주둔군을 통해 경복궁을 점령한다. 일본군 사상자 1명, 조선군 77명 사상(약 500명의 조선군이 경복궁을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자를 내고 조선군은 북한산쪽으로 도주했다고 적혀있다. 또한 책에는 일본군이 궁 근처로 접근하자 조선군이 먼저 발포했다는 형태로 기술하고 있으나 사상자 규모나 작전 계획으로 볼때 신빙성이 없어 보이는 설명이다. 최근에 공개된 상기의 일본군 작전 계획에는 열강의 참여를 막기 위해 외국 공사쪽으로는 절대 발포하지 말 것이나 고종과 대원군을 확보할 것 등을 자세히 명시하고 있었다.
3) 당시 일본 내각의 조선 내정 간섭이나 경복궁 점령 등이 조선의 독립을 위한 것이라는 논리가 모순됨은 다양한 관점에서 자세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일 전쟁은 이미 준비 진행한 것이고, 강해진 일본이 힘을, 외교전과 함께 효과적으로 보여줘야 할 뿐이었다. 이미 일본은 파병할때부터 전쟁을 염두해두고 있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4) 청일 전쟁의 결과에 대해 러시아가 주력으로 간섭하여 청국 주요 지역(북한과 가까운 요동반도 등)의 일본 할양을 막았다. 일본은 청국의 노장인 이홍장과의 협의에서 이러한 할양 조건을 관철시켰으나, 일본의 팽창을 우려한 러시아와 독일의 공조가 사후 이를 막은 것이다. 그리고 이 배경에는 일본이 청일전쟁의 피해로 러시아 독일 연합군과 개전할 수 없는, 특히 해전을 감당해 낼 수 없었던 배경이 무쓰 무네미쓰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러시아는 이미 해전 준비를 통해 일본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던 터였다.
5) 여하튼 이전 임오군란, 갑신정변때 청국에 밀렸다가, 드디어 청일전쟁에서 승전을 경험한 일본은 획득한 배상금으로 군사력을 더 확대해 향후 러일전쟁까지 치뤄 승리하게 된다. 두 전쟁 모두 상대국에 비해서 큰 우위는 아니었지만 전략을 잘 가져갔고, 단기에 우수한 성과를 거두고 평화조약을 맺음으로써 피해를 최소화한 공통점이 있다.
6) 이 책에는 청일전쟁 말미에 이홍장과 이토히로부미/무쓰 무네미쓰의 협상이 매우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북경으로의 진격에 대한 리스크를 짊어진 상황에서의 다양한 이홍장의 설득이나 논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조약 체결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것을 잃게 될것이라고 승자의 관점을 여지없이 전개한 이토 히로부미의 모습과 과정이 잘 나타나있다. 해당 책을 기술한 이유가 해당 종전선언의 삼국간섭에 의한 배상 축소 등에 대해 해명하기 위한 것이었겠구나 유추해볼 수 있다.
여하튼 이래저래 당시 외교전을 생생하게 이야기해주는 책 중의 하나. 그 시대 청/일/조선/러시아 등과의 국제정세를 이해함에 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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