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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 전후 역사를 통한 조선의 대외 의존 관계

작동미학 2022. 9. 11. 18:17

 이 글은 책 "청일전쟁, 근대 동아시아 문제의 기원", 이성환 작, 의 내용을 중심으로 당시 조선의 대외 관계에 대한 내용을 정리해보는 것이 목적이다. 이미 조선의 지리적 위치와 열강들의 세력관계가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는 소개를 한 적이 있다. 이를 더 자세히 한번 따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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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위치에 따른 과거 미래, 책 "격동의 동아시아를 겪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에는 각 나라의 위치가 얼마나 역사에서 중요한지에 대해 나온다. 그리고 구한말의 역사를 보다보면 한반도의 운명에 대해 여러가지 지리적인 관점의 인사이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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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입장에서는 한일 강제 병합이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게 된 시점이 되지만, 실질적으로는 청일 전쟁이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국제적으로 최초로 청을 넘어서 확정했다고 볼 수 있다(물론 그 사이에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졌던 시기가 있긴 하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한반도에 큰 영향을 끼친 열강의 중요 전쟁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청일 전쟁이며, 공식적으로 청국에서 일본으로의 세력 변경을 의미한다.

 

 조선은 잘 알려져있듯이 지속 청국(청나라)의 영향권하에 있었다. 그것이 아편전쟁 등 청국이 약해지는 상황에서도, 메이지 유신(1868년)을 거쳐 근대화를 이룩한 일본은 지속 조선에 개항을 요구하다가 번번히 거절당한다. 이것이 1870년 이전의 상황이다. 그러다가 일본이 결국에는 군함을 통해 조선을 압박하여 첫 국교를 수립하는데, 바로 유명한 강화도 조약(1876년 2월)이다. 사실은 청국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조약은 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일이기 때문에 반가울리가 없다. 다만 이 조약 진행에서 청국은 일본과의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다소 묵인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아마도 일본으로부터의 모종의 거래나, 국력이 약해진 상황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경우라고 하겠다. 사실은 청일전쟁 전 1880년대는 청국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원세계를 파견하여 다양한 속국 정책을 펼치는 등 여러가지 노력을 펼치지만(차관 제어, 통상 등 내정 간섭, 철도/전신 등 이권 개입 등), 결국 청일전쟁후 맺어진 시모노세키조약(1895년 4월 체결)으로 청은 조선에 대한 독립을 보장하는 형태로 그 권리를 완전히 포기하게 되며, 일본은 한반도 주도권에서 가장 큰 싸움 상대방을 제거하게 된다.

 

 강화도 조약(1876년)이후에 여러가지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정책들이 조선내 민중의 반대에 직면한 것이 바로 임오군란(1882년 7월)으로 볼 수 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 정부는 청에서 일본으로 기우는 몇가지 개화 정책을 진행해 나가고, 이에 대해서 반개화파인 반란군은 일본 공사관에 불을 지르며 대원군의 세력으로 회귀시키려고 노력한다. 이는 당시 개화세력으로 역할을 했던 민씨 일가의 주요 인사를 제거하는 것도 포함되어 당시에는 난을 피해 도망을 간 민비가 사망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고, 외척 민씨는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군사원조를 청했다고 한다. 이에 기반해 1882년 8월 청은 군대(4,500명 규모)를 파견한다. 여기에 주모자로 지목된 흥선대원군은 원세개에 의해 납치되어 톈진으로 압송되며 다시 민씨일가가 세력을 잡게 된다.

 

 이 시기를 소개한 이 책에서는 당시 청나라의 군사적 영향력은 확대되지만 일본은 경제적인 영향을 확대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임오군란의 반란군이 일본에 입힌 피해를 배상하기 위해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기 때문이다(1882년 8월)

 

 그리고 조선의 내부 급진 개화파(고종의 신임을 받던 김옥균 등)는 일본의 지원하에 갑신정변(1884년 12월)을 일으킨다. 이 정변에서 민씨일가는 개혁의 대상이되었는데 민씨 일가 몇이 이 난에서 크게 부상을 입거나(민영익) 죽임을 당한다. 김옥균 등 개화파에 대한 일본 지원 세력의 유명인사로 거론되는 인물은, 당시 일본이 계몽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이며 조슈번의 유력 정치인 이노우에 카오루 등이 같이 언급된다. 다만 역시 잘 알려졌다시피 이 정변은 청국군의 개입으로 인해(당시 1,500명 규모가 주둔) 개화파나 일본군의 부대 각 100명, 150명의 규모가 패배한다. 일본으로서는 또 한번 청국의 군대에 밀려 세력이 일거에 소탕당한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향후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앙갚음을 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고 설명할 수도 있겠다.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이노우에 카오루는 1,200명의 병력과 함께 조선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이토 히로부미 궁내경을 전권대사로 하여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과 텐진조약(1885년 4월)을 체결한다. 이 톈진조약은 훗날 일본에 이익을 가져다 준 것으로 평가되는데, 조선에서의 두 군대를 철수하고 한쪽이 조선에 파병하면 서로 통보하고 같이 파병하는 것으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결국은 이 조약이 양국간의 파병을 10여년간 억제하다가 결국 청일 전쟁의 도화선이 되고 만다. 그리고 이 청일전쟁 이후의 세력싸움에 러시아가 참여하면서 향후 러일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고 볼 수 있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 후 1896년 2월부터 고종이 아관파천을 통해 일본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1년을 지낸 것이 이러한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갑신정변 이후 체결된 톈진조약(1885년) 이후 외국 군대가 철수한 상황속에서 다시 10년의 시간을 보낸 후,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이는 톈진조약 전후 군사력으로 밀렸던 일본이 지속적인 전쟁 준비를 단행하여 그 효과를 본것으로 이 책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청일전쟁에 대한 중국측 기록에서는 사실은 청이 1894년 파병시에 일본이 파병하지 않을 것으로 사전에 의견 확인을 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청국이 파병하자 일본은 곧바로 그 의견을 무시하고 파병해버린다. 그리고 그 뒤에는 시베리아철도를 통해 남하하려는 러시아를 견제하는 일본의 또다른 전쟁 준비가 숨어있다.

 

 군사력 균형 상황을 잠깐 살펴보면 일본과 청국의 군사력은 1882년 시점에서는 일본의 상비군이 1만 9천여명(예비역 2만8천여명)이었으나 중국은 이홍장의 군대만 10만명이 넘었다. 일본도 1877년 서남전쟁 등의 자국 내전으로 긴축 재정을 요구받고 있었으나 1882년 17%에서 1892년 31%까지 군비 지출을 늘린다. 1894년에는 일본도 13만8천명 정도의 병력규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청일전쟁 이전까지 해군력도 증강시켜 청국에 비해 양에서는 뒤졌지만 속도 성능면에서는 우세를 지니게 되었다. 1885년 2만8천톤(25척)규모의 해군력은 1895년 7만7천톤(69척)으로 향상되었다. 일본은 열강의 경쟁에 끼어들어 동북아시아를 지배하려는 패권의 목적을 이미 이 시기 가지고 있었다.

 

 개항에 따른 경제적 혼란 속에 1894년 1월 전북에도 동학군 1만명이 봉기한 이후 조선정부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5월말경에 조선은 청에 원병을 요청하고,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군도 곧바로 조선에 파병되게 된다. 6월초에는 중국군 2,500명 규모, 일본군 8,000명 규모가 조선에 도착한다. 일본군은 임오군란과 갑오개혁에 밀렸던 과거 사례를 극복하고자 대규모 파병을 단행하게 된다.

 동학군과 정부군은 사실 6월에 전주화약을 통해 휴전을 이뤄내고 난은 소강 상태에 이른다. 그리고 조선 정부는 이런 안정화를 기반해 청군 및 일본군에 철군을 요청했지만, 일본은 조선의 개혁이 필요하다며 철군을 거부한다. 이 상황에서 이미 일본은 개혁에 대해 조선정부를 압박하는 내정간섭을 시작했고, 이에 나름 조선정부도 동학군과 여러가지 의견을 반영하여 개혁 조치를 단행하지만, 사실상 조선의 개혁보다는 일본은 조선의 병참기지화를 진행시켰다. 곧 발발할 전쟁에서 조선이 청을 돕는 것이 아니라 일본을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일본군은 1894년 7월23일 새벽에 계획하에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과 대원군의 신병을 확보한다. 당시 서울에는 1천여명의 일본군이 주둔중이었고 경복궁에는 조선군 약 5백여명이 있었다고 한다. 해당 야간 경복궁 점령 작전을 통해 일본군 1명이 사망하고 조선군은 77명의 사상자를 내고 경복궁을 내주었다고 한다.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후 곧바로 조선은 7월25일에 청에 철군 통지를 하고, 일본군을 지원하는 칙령을 반포한다. 그리고 이어진 청일전쟁기간에 150만명의 인력이 차출되어 지원한것으로 기록되는데 그 대부분이 조선인일것이라고 책은 추정한다.

 

 결국 이 시기 조선은 청국과 일본에 번갈아 크게 영향을 받았다가 일본의 무력에 의해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일본으로 한번 완전히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팽창을 염려한 러시아에서 의해서 이러한 팽창이 견제를 받게 된다. 유명한 청일전쟁의 일본 승리후 할양받기로 했던 랴오듕 반도 할양 취소이다. 그리고 1895년 10월 발생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발단을 보자면, 조선정부가 내정간섭하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로 방향 선회를 하게 되고 이를 뒤에서 조정한다고 생각한 명성황후를 일본의 미우라 고로 공사 등의 주도로 제거하는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국적인 일제 저항과 아관파천(1896년 2월) 등 오히려 역풍을 불러 일으켜 러시아 세력이 더 강화되는 상황을 만들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확장은 이후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더이상 아시아에서의 견제세력이 없어지게 되고 조선은 한일 강제 병합으로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통감으로서의 여러가지 조약 체결 그리고 헤이그 밀사 파견을 빌미로 한 고종의 폐위 및 순종의 즉위 등 여러가지로 이어지게 된다.

 

 조금 빠르게 기술하여 보았으나, 한반도는 특정 강대국의 팽창에 따라 몇번 크게 세력관계가 변경되는 경험을 했고, 그 결과는 대리전을 치루거나 그 전쟁터를 제공하거나 그 과정에서 병참기지로서 착취당하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러한 과거는 오늘날에도 되풀이될 개연성을 충분히 안고 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주변 강대국이 패권 확대를 선언하는 순간, 또다시 고종과 명성황후가 만났던 순간이 반복될 수 있다. 이 점은 늘 과거를 교훈삼아 미래를 고민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