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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외교관 베베르와 조선

작동미학 2021. 11. 5. 11:04

 1890년대 격동의 구한말에 대해 제삼자의 입장에서 자세한 기록 중 하나가 이 베베르의 보고서들인데, 너무나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직접 책을 쓰지는 않았으나 서울 주재 초대 러시아 조선 공사 베베르(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 )는 러시아 외무성에 해당 시기 12년(1885~1897)간 보고한 기록들을 러시아에서 정리하여 출판한 것인데, 이 기록의 소중함은 조선을 타 열강으로부터 지키려는 당대 유능한 지식인의 관점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당시 열강들과 경쟁관계에 놓이면서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 열강쪽으로 조선이 흡수되어 버리면 곧바로 군사적/경제적 위협에 놓이게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조선의 독립을 유지하고 보호해야 하는 이해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그 이해관계에 따라 조선을 보호하는 입장에 취하게 되고 청나라와 일본의 다양한 조선 병합 활동을 견제하면서 최대한 조선이 힘을 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의 베베르의 타 열강과의 투쟁과 기록은 당시 조선의 안타까운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고 독려하고 있었다. 조력자이자 선생님이었고 혼을 낼 때도 있었던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상세한 조사와 일본에 대한 노련한 항의, 그리고 아관파천 시기에 고종에 대한 지원 등은 후일 고종에 대한 두터운 신임을 받는 데에 이상할 것이 없었고, 오히려 러시아 외무성에 조선에 대한 지원이나 개입을 지나치게 요구하면서(어찌 보면 너무 조선 편을 들어서) 관계가 나빠진 정황마저도 갖고 있는 인물이다. 결과적으로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당시 러시아는 청국과 일본으로 부터 조선에 도피처를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https://books.google.co.kr/books/about/%EB%9F%AC%EC%8B%9C%EC%95%84_%EC%99%B8%EA%B5%90%EA%B4%80_%EB%B2%A0%EB%B2%A0%EB%A5%B4%EC%99%80_%EC%A1%B0%EC%84%A0.html?id=ZFUmEAAAQBAJ&printsec=frontcover&source=kp_read_button&hl=ko&redir_esc=y#v=onepage&q&f=false 

 

러시아 외교관 베베르와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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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미 주변 열강에 의해 압도되었던 조선이 겪은 다양한 운명을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초기 청의 세력하에서 조선에 파견된 위안스카이가 조선을 청의 지배하에 두고 병합하기 위해 펼친 지독한 견제 정책의 시기와 청일 전쟁을 통해 결국 이 균형이 일본으로 넘어가버린 시기, 일본이 청과 동일하게 조선을 병합하기 위해 펼친 또 다른 만행들(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고종에 대한 사실상의 감금/압박)과 그것을 막으려는 러시아와 결국 러일전쟁을 통해 일본에 완전히 압도되는 그 중간 과정을 알 수 있게 된다.

 

 그 와중에 발생한 갑신 정변과 조선 궁궐 정치의 다양한 모습들, 소요, 죽음이 난무하는 정치 투쟁, 대원군과 명성황후, 고종 및 친청/친러/친일 세력들의 모습 또한 엿볼 수 있다. 외교관의 기록이라는 점에서도 이 책은 구한말 조선을 이해하는데 소중한 사료라고 평가하고 싶다. 특히나 명성황후 시해와 아관파천을 둘러싼 그의 러시아 외무성 보고 내용은 그 유능함이 그대로 느껴질만큼 잘 대처하고 다양하게 일본에 대항해 주었다. 그리고 명성황후 시해를 둘러싼 일본의 조직적인 대응이나 관심 돌리기, 거짓말 그리고 후일 재판의 결과(모든 계획과 추진을 인정하면서도 마지막에 실행했다는 증거가 없으므로 무죄 처리한 일본 내 판결)는 경악스럽지 않을 수 없다. 베베르는 이 사건을 임진왜란에 이어 조선에 일본 혐오를 뿌리내리게 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 및 이것이 알려진 이후 조선의 전국적인 소요, 고종의 경복궁 탈출 및 아관파천에 따른 여러 가지 행동은 베베르의 지적대로 세계 유래가 없는 불법적이고 파렴치한 행동이었다고 평가한다.그러나 앞서 기술한 대로 조선을 둘러싼 패권 전쟁은 그 축이 청일, 러일전쟁을 통해 일본으로 넘어갔고 이러한 혐오감에도 불구하고 여러 전략에 의해 한일 강제 병합에 이르게 된 것이다. 

 

 베베르가 러시아로 돌아간 후, 러일전쟁전 1902년경에 다시 잠시 조선에 방문을 해서 쓴 글이 있는데, 고종이 그를 한사코 조선에 머물러 도와달라고 권유하지만 조선의 상황에 실망하며 여생을 여기서 보낼 수 없어 러시아로 돌아가고 싶다는 자국에 보고한 내용이 인상 깊고 지금의 우리도 곱씹어야 할 내용이라 생각해 타이핑하면서 간단히 책 소개를 마무리하고 싶다. 최대한 일본에 대한 지배를 늦추고 러시아로 복귀한 그가 1902년 고종황제 즉위 40주년 기념 시에 다시 들어와 상황이 더 악화된 것을 보고 한탄하는 내용이다.

 

1902년 10월시기에 대한 보고

"오랜 시간 떠나 있다가 작년 가을 다시 한국에 왔습니다. 그러자 제 앞에는 정치생활뿐 아니라 사회생활마저 뒤로 후퇴하는 매우 슬픈 광경이 보였습니다. 정부 내에서는 개혁 이전인 10년 전에 창궐했던 것과 똑같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국가라는 여물통에 더 가까이 있거나 국왕의 후의를 누리거나, 아니면 권력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음모와 계략, 그리고 권력남용이 똑같이 횡행했으며, 인민에게서 마지막 남은 생명력, 마지막 남은 곡식 한 톨까지 쥐어짜려는 똑같은 모습이 보였습니다. 과거에 비해 수는 배로 많아졌으나 규율이 흐트러지고 복장이 빈약한 군인들의 모습은 불쌍했습니다. 관직은 지식이나 경력, 공훈에 따라 임명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연고나 헌납할 수 있는 재산을 보고 임명합니다. 상업에서 이윤이 유통되는 자본의 회전 속도에 직접 좌우되는 것처럼, 관직을 파는 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관직을 산 자들을 그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고, 그 자리를 더욱 빈번히 교체하는 것입니다. 세금이 증가해도 국고에는 항상 돈이 없어 쪼들렸으며, 백성의 정신과 육체 상태 개선, 학교와 기술교육기관 건설, 양호한 교통로 건설 등에 쓸 자금은 없습니다. 관리, 병사, 포졸들의 녹봉에 들어가는 불가피한 지출을 제외하고, 수입의 상당 부분은 무용하고 비생산적인 구매로, 그리고 마지막이지만 결코 무시하지 못할 황제의 변덕 충족, 사치스러운 행사, 궁궐과 사원, 왕실 묘의 건립, 내시, 점쟁이, 궁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무당의 부양 등에 막대하게 지출되어 탕진되기 때문입니다. 무당은 황제-이전보다 더 미신을 믿고 있지만-의 탓이라기보다는 황제의 첩인 엄비 탓일 것입니다. 엄비는 평민 출신으로 유력 가문의 후원을 받지 못하므로 자기 목적을 위해 여성 주술사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 상황에 관해서 말하면, 자금의 상황이 현저히 나빠졌습니다. 일본은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나라의 독립을 해치려 하면서도 그들의 독립 유지를 보장할 것이라고 대한제국 정부를 항상 확신시키고 있습니다. 1896년 뒤쪽으로 물러서게 된 후 일본인들은 전술을 바꿨습니다. 이전에는 당연히 자신들의 물질적 이익은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으면서, 어느 정도는 한국의 행정체계 정비에 신경을 썼지만, 최근에는 자신의 영향력 회복과 강화를 위해 이 나라를 정치적, 재정적으로 예속시키고 완전히 몰락시키려는 갖은 조치를 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원칙은 이렇습니다. 즉, 한국의 국내 상황이 악화되면 될수록, 또한 매수와 수뢰, 압제, 상호 모략이 퍼지면 퍼질수록, 그들의 침탈에 대한 이 나라의 저항이 더욱 무기력해진다는 것, 그리고 국민이 자기 정부에 대한 불평이 강하면 강할수록, 국민들은 견딜 수 없는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더 자진해서 일본의 보호를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행동 방식에서 생기는 모든 이익은 일본 쪽에 있습니다. 일본은 첨예하고 경솔한 행동으로 우리의 항의나 심하면 전쟁 같은 것이 초래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므로, 이곳 정부와 이 나라의 행복을 계략에 빠뜨릴 조용하고 꼼꼼하면서도 체계적인 막후 공작에 착수했습니다. 그 공작은 너무나 조용해서 한국인들조차 알아채지 못할 정도이며, 러시아에게는 그런 공작을 중단시킬 합법적인 근거가 없습니다."

 

 여러가지 앞서 소개한 기록처럼 지금도 동아시아는 패권의 각축장이며 그 크기와 역학만 변화했지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이해가 다양하게 얽혀있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여기 묘사된 1890년대는 후세에도 두고두고 한해 한해(1894~1896년은 더욱더) 복기할 필요가 있는 시기가 아닌가. 이 책이 그 중심이 되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저러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부단히 과거를 교훈 삼아 헤쳐나가야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