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산책
일제 강점기 직전 구한말의 조선과 글로벌 정세 배경, 우금치 전투 본문
역사는 너무도 복잡하다. 단 하루가 짧아 보이지만, 이 하루 전체의 세계 모든 역사를 이해하는 일도 사실 불가능하다. 70억 인구가 만들어내는 사건의 연속과 관계들은 그야말로 무한의 복잡성 안에서 돌고 있는 모습이겠다.
그리고 이 하루에 다시 과거라는 시간의 축을 더해서 계속 더 올라가다 보면, 그 복잡성 속에서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은 도무지 어떤 것인지 헷갈리기 쉽다. 정량적인 것은 온데간데 없이, 중요한 것이 사라져 버리기 쉬우며 임의의 중요도로 포장된 왜곡된 것들이 범람하게 된다. 그래서 단순하지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힘있는 관점이 필요한데, 그런 면에서 "숫자"는 그나마 이런 세상을 정확히 볼 수 있는 시야를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자, 이제 눈을 감고 내가 선사시대에 태어나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처럼 지금도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다고 생각해보자. 만년 조금 안되게 살았다 치자. 그러면 여러가지 이 기나긴 인생을 통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었겠지만, 사실은 묘하게도, 세상은 별로 큰 변화가 없다가 A.D. 1800년 쯤에 많은 것들이 급변하기 시작한다. 조금더 과격하게 표현해보면, 실제 인류의 발전된 문명은 1800년부터 그 성장을 시작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아니 이것이 대체 무슨 말인가? 기원전에 벌어졌던 서양의 찬란한 그리스/로마 문명에서, 1300년대 르네상스 시대를 거친 어마어마한 스토리들은 다 무엇인가? 한반도의 단군 이래로 조선 건국을 비롯해 기타 수많은 그 이전 시대들은 다 어떻게 된 것인가? 물론 그 시기 다양한 토양을 다진 것은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을 단순하게 바라보면, 1800년경 그 이전 시기는,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사실은 별로 변화가 없었다. 그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아래 전세계 GDP 변화 추론이다.

1800년 이전의 세상에는 우리가 다양하게 배워온, 역사에 두고두고 기억될 스토리들이 가득차 있다고 하더라도, 그보다 더 압도적으로 어마어마한, 경제적으로 진보한 '근대, 현대'가 탄생해 버린 것이다. 1800년 후 인류의 발전은 수치로서 그 이전 시대를 간단히 변화가 없던 기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1800년 이전 시대의 인류의 삶은 전체적으로는 수렵채집 생활 수준에 비해 변한 것이 크게 없다. 이전에 우리가 역사속에서 읽어왔던 발전이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로 1800년 이후의 인류 진보는 그 이전의 진보를 잡음 정도로 만들어 버린다.
예컨데 1800년 이전의 위 소득 그래프를 50%쯤 좀더 낮춘다고 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저 바닥 어딘가일 뿐이다. 수많은 역사가들이 각자 당대의 자신이 속했던 과거를 좀더 현대의 우리와 비슷하게 기술해왔지만, 수치로 환산된 1800년 이전의 과거 세상은 그 시기에 따른 변화가 미미했던 시절이다. 혁신이 등장했다가 다시 사라지고 재탄생했다 치더라도 전체적으로는 역시 변화가 없는 시기다.
생산성 관점에서 지금의 GDP와 비교해보면 1800년대 이전의 전 세계는 다 같이 낙후된 세상에서 살았다. 당시에 아무리 강대한 나라였더라도 그 나라가 가진 부는 현대로 넘어오게 되면 곧바로 가장 못사는 나라 그룹으로 편입된다. 예를 들면 과거 세계적인 강대국의 경제력이라도 지금의 서울의 어떤 '구' 정도의 수준 밖에 되지 못할테다. 현재의 북한의 전체 GDP를 서울 종로구 경제력 정도에 비유할 수 있는데, 그 북한보다 못사는 것이 과거의 강대국이다. 우리가 사는 현대시대의 국가들의 경제적 위상은 명백하게 그 어떤 과거의 전세계 경제력을 압도할 수 있다.
(잠깐 더 진도를 나가기 전에 이 1800이라는 숫자를 설명해보면, 이 1800년대가 국제적으로도 과학적/기술적 발견이 폭발했으면서도 우리나라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시기이기 때문에 적절히 선정했다. 실제로는 17세기에서 19세기 어딘가로 볼 수도 있겠다. 나머지는 독자가 그래프와 사건 안에서 더 판단하면 되겠다.)
소득에 대한 조금 더 자세한 표를 실어본다. 여기에는 한국(South Korea)도 같이 등장한다. 이 그래프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고 더 자세히 봐두면 좋겠다. 미국, 영국, 우리나라의 변화를 자세히 보라.

비교를 위해 이 그래프와 현재의 GDP를 대략 투사해보자. 1800년대의 영국은 지금의 방글라데시 정도의 경제력을 지녔다. 역사를 단순히 GDP로 말하기는 어려울 수 있으나 지금 각국의 생활환경을 보면 그 수치가 의미하는 바가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확인한 것은 서양에서의 배의 규모 변화이다. 해당 1800년경 급격한 발전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역시 유사한 패턴을 지닌다.

전세계의 역사적 인구 변화도 GDP와 맥을 같이한다. 기술의 진보는 삶과 식량 및 주거 환경에도 영향을 끼쳐서 그대로 인구의 확장을 가져왔다. 그리고 전세계의 부는 위 인구당 소득 그래프와 아래 인구 그래프가 곱해져서 나온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의 전세계 부 변화는 더 극적으로 변하게 된다.

필자는 예전에 이 추정을 근거로 인류의 역사 전체 누적 대학졸업자와 현재 살아 있는 대학졸업자의 비율을 계산해본적이 있는데, 기존 과거 전체 누적된 전세계의 대학졸업자 중에 거의 1/5 (20%)정도가 지금 우리 시대에 살아있는게 아닌가 간단히 유추되었다. 우리나라만 보면 그 비율이 아마 90%가 넘을것이다. 1950년대 이전 태어난 사람이 대학을 나왔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지금의 대학 졸업자수를 생각해보라.
또한 우리나라의 현재 생존해있는 대학 졸업자의 수가 인류가 탄생해서 아인슈타인 활동시기 이전 시기까지 누적된, 전세계 대학졸업자 전체와 맞먹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1900년의 전체 대학졸업자 당 아인슈타인(?)의 비율을 가지고, 우리시대의 아인슈타인 수를 구해보면 수백 수천명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 이렇게 현대는 인재가 가득한 기적의 시대다. 지금은 여러가지 면에서 과거를 압도하는 수준이다. 물질문명의 관점에서는 축복의 시대이며, 지금의 인구 규모가 터무니없이 작은 나라만 아니면, 1800년의 가장 부강한 나라를 압도하는 시대이다.
그리고 이를 조금 다르게 보면, 불행히도 이 발전과 변화의 시기였던 1800년대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많은 국가의 그 직후 운명이 그 어떤 시대보다 심하게 분기되어 이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에 살펴보듯이 돋보기를 가지고 저 그래프의 특정 시기를 확대해 한반도의 운명을 살펴보자면, 그 발전에 합류하지 못했던 어두운 역사를 알 수 있게 된다.
다시 돌아와서, 이렇게 다양한 변화가 시작된 1800년대를 그 이전과 가르는 대표 요인을, 산업혁명을 시작으로 한 과학기술문명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한 사람의 생산성을 저렇게 극적으로 증대시킬 수 있는 요소는 지금도 많지 않은데, 1800년대가 과거와 명백히 다른 것이 바로 과학기술(엔진, 석유, 기차, 전기, 화학, 자동차, 컴퓨터 등으로 대표되는)이다.
1800년은 전세계의 중요한 과학기술이 모두 태동된 시기이다. 전자기파에 대한 이해나 양자역학이 시작된 시기이고, 뉴튼시대를 거치면서 과학 이론은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출산을 집도하는 의사가 손을 씻어야 한다는 지금은 상식적인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이 시기이며,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배우는 과학과 공학 지식의 대부분이 이 1800년대에 완성되었다. 그 기반을 딛고 현대의 생산성 향상을 이룬 모든 지식들이 이 시기에 기초를 잡으며 쏟아진 셈이다. 생산성 혁명을 일으킨 기계와 원료의 등장 및 그 개선, 에너지/화학, 정보처리 등등 헤아릴 수 없다.
조금 관점을 바꿔보면, 더 극적으로 이 기술에 의한 생산성 향상을 대표적으로 축약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전쟁이다. 전쟁의 역사는 누구나 중요해서 매우 잘 기록되어 있으며 연구되어 있다. 잘 보관된 문명의 화석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1800년대 이전 즈음의 전쟁을 살펴보면, 사실은 크게 비대칭이지 않았다. 물론 화살, 창, 기마 부대 등 특이 사항이 없는 것도 아니었겠으나 기본적으로 여러사람이 양쪽에 모여서 가운데에서 만나 특별히 다르지 않은 무기로 상대편을 공격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결론적으로 그 시절은 무기 체계의 발전이 전투의 양상에 변화를 주는 효과가 그렇게 크지 않았던 시기이다.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격차를 벌인 무기 기술에 비하면 말이다)
즉, 1800년대 중반 정도에도 가장 최신 무기를 들고 있는 부대와 과거 10년전의 무기를 들고 있는 부대가 싸워도 상호간의 죽는 비율이 10배가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 본다. 처음에는 한쪽이 당할 수도 있으나 곧 시행착오를 통해 어느정도 극복될 수 있다. 물론 장창이나 장궁, 기마병 같은 무기의 우위들이 간간히 나타났으나, 이것들이 지니는 전쟁 효율성의 변화는 마치 처음에 봤던 그 과거의 GDP변화 정도와 많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1800년 이전에는 한쪽은 1명이 죽고 한쪽은 100명이 죽는 그런 압도적 싸움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머리수가 기본적으로 중요했으며 전투는 상식 수준에서 결론이 난다. 더 많은 사람이 이기는게 일반적이다. 소수는 다수를 이기기 어렵고, 일정 규모의 군대는 절대로 무시될 수 없다. 어찌보면 세상은 그 나름대로 평등했다. 사람이 많으면 이긴다는 것이 대부분 맞는 시기이다.
그런데 1800년대 즈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서양의 자연과학이론의 발전과 기계 문명의 등장 및 산업혁명이 이어지면서 이 전투의 사상자 비율이 본격적으로 변화했다. 이때부터 기술이 앞선 부대와 그렇지 않은 부대의 사상자 수는 압도적인 비율로 정해지는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드디어 이 글을 쓰게 된 이유가 된, 이 서글픈 변화 속에서 조선의 운명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줬던 사건이 있다. 바로, 1800년대의 끝머리인 1894년 11월 말부터 12월 초에 벌어진, 동학농민운동의 마지막 대전투이자 학살전이라고 불렸던 우금치 전투다. 이 전투는 그야말로 민족의 통한의 역사이다. 더도 덜도 없다. 그때 우리가 가진, 이전 과거와 별반 다를바 없이 이어지던 기술 및 체계가, 외세의 급격히 발전한 기술 문명에 밀려 최악으로 참패한 대표적 사건이다.
기억하고 또 반복해서는 안되는, 조선 민중의 의지가 압도적 외세의 기술 문명에 밀려 완패한 전투의 상징이다. (해당 무기가 조선 관군의 무기이고 다소 내전성격을 겸비하나, 결국 일본군의 통제하에 들어간 신식 군대이다. 심지어 동학군은 개틀링 기관총을 포획하기도 했는데 불행히도 활용할 능력이나 이에 대비할 능력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동학혁명군 최소 1만명과 조선 관군/일본군 2천명이 벌인 이 전투에서 후자의 사망자는 많아야 수십명 수준이고, 혁명군의 사망자는 9,500명(최대 만명 이상)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 숫자는 조사별로 다르나 그 압도적인 비율은 별로 다르지 않다. 그야말로 서양 문명을 흡수한 일본에 의해 통제되는, 신식 무기를 가진 군대가 학살한 전투이다. 이 시기 즈음에서 기술문명 국가는 마음만 먹으면 아직 개화되지 않은 나라를 소규모의 군대로도 엄청난 다수를 별 손실없이 압도할 수 있게 되었다. 아래를 자세히 읽어보자.
http://www.tbs.seoul.kr/news/bunya.do?method=daum_html2&seq_800=10252462&typ_800=12
<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 [서해성의 박학다설] ‘10000 대 0, 우금치 학살’
*내용 인용시 tbs <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와의 인터뷰 내용임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서해성의 박학다설] ‘10000 대 0, 우금치 학살’● 방송 : 2017. 12. 1. (금) 18:18~20:00 FM 95.1● 진행 : 김종배 시사평론가● 대
tbs.seoul.kr
그리고 이런 선진 기술을 가진 군대와 구시대의 방법으로 싸운 비대칭 전투가 1800년대 말부터는 드물지 않았다. 이제 사람 수보다는 과학 기술이 훨씬 더 중요해졌다. 기술에 의한 전투 생산성 향상이 엄청나졌기 때문이다.
우금치 전투때의 신식무기 중 하나가 바로 개틀링 기관총이었다. 기술이 한 사람의 생산성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리는 대표 사례이며 1800년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알리는 당시의 첨단 무기이고 그 시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이 기관총은 더 개량되면서 1,2차 세계대전 시에도 한쪽의 대량의 사상자가 난 케이스가 역시 꽤 있다.
https://1boon.kakao.com/dema/585ccfc7e787d000016f4281
전쟁의 역사를 바꾼 기관총의 탄생과 진화
1boon.kakao.com
즉 이 1800년대를 지나면서 인류는 기술이 어떻게 생산성을 올리는지 확인했고, 그 기술을 보유한 국가가 그렇지 않은 국가를 집어 삼키는 야만의 각축장으로 변모했다. 제국주의와 식민지 시대가 극에 달했던 시기이다.
위 글에 나왔던 동학농민운동으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우금치 전투 몇개월 전, 그러니까 1894년 동학군의 정부에 반해 최초 봉기한 이후 전주성을 점령한 것이 5월 31일이다. 그리고 6월10일에 전주화약을 체결한다. 고종이 조선내부 관군만으로 동학군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자 청군에게 원병을 청했기 때문에 일본의 개입을 우려한 동학군이 자진해서 물러난 것이다. 그런데 이때 주둔한 일본군과 청군이 돌아가지 않고 계속 조선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7월 23일 새벽4시에 일본군이 경복궁 영추문을 통해 난입(요시마사, 일본군 구여단장, 딸의 딸의 손자가 현재 아베신조. 일본의 상황은 나중에 확인해보자.)해 경비대와 총격적을 벌이고, 고종을 체포하고 연금인질 상태에 빠지게 한 후, 7월 25일 일본은 청일전쟁을 시작했다. 일본으로서는 조선군이 청나라를 지원하지 못하게 완전히 무력화 시키고 후속조치를 통해 청일전쟁에서 조선이 일본을 지원토록 한다.
이 소식을 듣고 동학군이 일본군과 전면전으로 맞서기로 하고 진군하다가 벌인 전투가 바로 이 우금치 전투인 것이다. 고종을 압박해 조선군의 작전권을 일본군이 위임받아 조선의 관군과 같이 벌인 전투이다. 그 전에 전주성을 내준 관군의 체계가 일본군에 의해 통제되어 뒤바뀌어 치뤄진 전투인 셈이다. 그리고 이때 사용했던 무기가 독일제 크루프(Krupp) 야포와 개틀링 기관총이다.
이 우금치 전투는 인류역사에서도 그 시기 거의 유래없는, 머신건 즉 연사무기에 의해 압도적으로 벌어진 집단학살이다(1893년 10월 25일에 영국남아프리카회사가 아프리카 마테벨레 종족과 벌인 1만명과의 전투에서 영국쪽이 100명 정도 죽은 사례 이후 한명의 손실도 입히지 못한 전투라고 함). 그리고 우금치 전투 다음해인 1895년 경복궁에서의 명성황후 암살 사건, 을미사변으로 이어진다.
구한말의 역사의 단편을 살펴보았다. 위의 과거들은 지금도 일부 반복되고 있고, 벌어질 수 있다. 국가간 경쟁환경에서는 지금도 앞서 소개했던 그래프가 계속 동일한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배우고 또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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