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산책
광화문 앞 해치상(해태)의 수난의 역사 본문
최근에 광화문 앞 월대가 복원되었다('23.10월) 간신히 광화문 앞 도로의 안쪽에 자리잡게된 이 월대를 보며 반가운 마음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전부터 마음이 가는 것은 그 양 옆에 재배치된 해치상(해태)이다.
경복궁에서 백년이상 온전히 보존된 것이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 않은데(동십자각, 경회루, 근정전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지금의 월대처럼 다시 만든 것이다), 이 해치상이 바로 백년이상 변하지 않은 것 중에 하나다. 경복궁 중건(1867년)즈음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870년 고종실록에 해치상을 세워 하마비-말에서 내리는 지표석-로 삼았다는 기록이 등장하며, 구한말 사진 속의 해치상 상태에 손상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더 이전에 제작된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이 변하지 않음은 사실은 반만 맞다. 해치상은 여러가지 내부적인 변화와 이동, 손상 속에 지금까지 '버텨'왔다. 구한말 경복궁의 역사적 수난이 이 해치상에는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해치상은 경복궁의 화마를 막아주면서, 관리들의 청렴함을 감독하고, 또한 기 언급된 하마석, 즉 궁에 들어가기 전 말에서 내려하는 궁궐 권역을 알리는 지표석의 역할을 겸하며 맨 처음 설치되었다(그래서 해치상 옆에는 말에서 내릴 수 있는 낮은 석기둥이 같이 있었다. 아래 공유된 사진 들 중 참조). 이렇게 2개의 석상이 광화문 양 옆에 위치되었고, 현재 월대 복원으로 이동된 위치보다는 더 광화문 바깥쪽에 위치했었다.
이전에 이러한 내용을 추적한 글을 참조해본다. https://jongnowalk.tistory.com/25
이 해치상은 그렇게 일제시대 초기까지는 그래도 자리를 지켰다. 사진마다 어린이들이 이 해치상에 올라가 있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었던 것으로 봐서는, 조선시대에 그렇게 엄하게 관리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시절 그 주변을 지나다니던 서민들 누구나에게나 친숙한 상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1920년대까지 제자리를 지켰던 해치상은 가엽게도 1923년 10월에 경복궁 안쪽 어딘가에 치워진 채로 사진이 찍혀 공개되었다.
설명에 의하면 일제에 의해 개통된 전차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그나마 폐기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동아일보 1923.10.4일자 기사는 그렇게 거적을 둘러쓰고 방치된 해치상 2개의 사진을 전하고 있다. 몇년동안 그렇게 방치되다가 일제가 이 해치상을 조선총독부(중앙청) 뜰 안으로 다시 옮겨 놓았다. 그리고 이 해치상은 1968년 12월 광화문 복원때 재이전한다. 이 중간에도 지속된 이전이 있었던 모양이다. 2006년 광화문 복원사업 시에 2년 정도 다시 창고에 보관되었다 옮겨졌다는 기사가 있다.
이렇게 여러군데로 옮겨지다 보니 상처도 나고, 기존 돌의 위치도 바뀌었다. 한쪽 해치상의 왼쪽 팔쪽 균열을 포함해, 상기 과거 사진들과의 비교를 통해 얻어낸 결론은 하단 기반석도 일부 바뀌었다는 점이다. 원래 자리에 있었으면 그대로였을 것들이 일제에 의해 수난을 겪고, 근대사를 겪으면서 이것저것 바뀌고 변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무엇일까? 돌이켜보면 장시간에 걸쳐서 분할되어 옮겨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저정도 밖에 파손되지 않았고, 돌의 위치 변화도 크지 않다는 점이다. 심지어 과거의 훼손된 기반석은 보수되어 재사용되었다. 서로 다른 누군가가 저 혼란의 와중에서도, 그 기억을 가지고 140여년간 챙긴 셈이다. 1920년대에 경복궁 어딘가에 방치되었을 때도 기반석들과 같이 누군가 옮겨놓았고, 다시 자리를 잡을 때는 최대한 기존 모습을 유지하도록 했다. 그 일을 했던 것은 우리네 관심있었던 누군가가 아니었을까. 옮겨질 때마다 해치상이 변하고 훼손되는 것을 최대한 막고 싶었던 그 누군가 아니겠는가. 폭격맞아 파괴되었던 광화문이나, 지금도 총알자국이 여기저기 남아있는 동십자각에 비교해보면 한국전쟁시의 특별한 상처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지금 그 모습이 더 기특하다. 우여 곡절 끝에 구한말 어린이들이 기대어 놀던 해치상이, 고생 속에서도 더이상 변형이나 파괴없이 계속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얼마나 기특한지 모르겠다. 마치 집에 기르던 애완 동물이 여기저기 헤매이다 수많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그런 마음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 해치상이 역사속의 당시 한반도의 운명을 대신 보여준게 아닌가 싶은 마음에, 볼때마다 짠한 것이 이를 지켜본 사람의 마음이다. 어렸을적 온갖 고초를 겪다가 돌아온 영화속의 백구가 여기에 있는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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